저자

길혜연

출판사

공중정원

분야

소설

정가

15 000 원

발행일

2024.6.16

작품소개

1919년, 상하이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대형 여객선을 타고 조선에서 탈출한 정해용과, 약 70년 후 그의 뒤를 쫓는 김현우의 이야기.

구상에서 탈고까지 23년이 걸린, 이 소설의 저자 길혜연 작가는 프랑스 현대 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해 왔다. 이 작품은 그의 첫 장편 소설이다. 프랑스 현지에서 3년간 집필한 프랑스 문학 기행서 《마음은 천천히 그곳을 걷는다》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 문학 도서로 선정된 이후, 11년 만에 출간되는 책이기도 하다.

‘장편 소설 한 편을 쓰려면 작가를 포함한 여러 사람의 일생이 필요하다’라고 한 저자의 말대로, 이 소설에는 남다른 삶을 산, 1895년생 정해용과 1960년생 김현우 두 사람의 백여 년에 걸친 가족사가 펼쳐진다. 정해용의 옛 연인 전단옥, 아내인 넬리, 자녀인 마리즈와 앙투안, 김현우의 아버지 김사덕, 형인 김현세의 이야기는 한국과 프랑스의 파란만장했던 20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김현우는, 처음엔 자신이 왜 타인의 삶에 그토록 끌리는지 이유를 모르지만,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싶어서였다는 것을 점차 깨닫는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고 섬세한 망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양자 역학적 힌트를 얻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가족사가 펼쳐지는 가운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용이 연루된, 대한 제국 황실 비자금 해외 밀반출 사건의 전모 또한 조금씩 베일을 벗는다.

1908년 파리, 1919년 상하이, 무르만스크, 에든버러, 1920년 프랑스 동부 쉬이프, 파리 등, 시공간적 배경을 설정하면서, 작가는 자료 조사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특히 1919년 러시아 극지방 무르만스크에서 영국인 함대를 따라 탈출한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자료는, 영국과 프랑스 현지의 기록 보관소까지 조사했다. 그렇다 해도 이것은 역사 소설이 아니다. 작가는, 이 소설이 역사 소설이 아니게 하려고, 외교 문서 같은 사료와 역사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제목인 ‘하얀 십자가의 숲’은, 낯선 땅에 떨어진 정해용에게 재기의 발판이 되어 준, 1차 대전 서부전선 격전지 프랑스 동부 쉬이프의 국군묘지 이미지에서 비롯되었다.

제국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오리엔탈리즘, 공산주의, 민주주의 등, 서로 다른 이념들의 대립을 가장 먼 원경에 배치한 채, 역사적 사실과 실존 인물에서 영감을 받았으나, 완전히 가공(加工)된 인물들을 통해, 고통으로 점철되어 분열되고 해체된 것으로 보이는, 어떤 개인들의 삶은 결코, 망가진 채 고립된 삶이 아니며, 다만 거미줄 위에 서로 연결되어 이슬처럼 맺혀 있는 조각 그림과도 같음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해가 나면 이슬은 사라지고 거미줄 또한 영원할 수는 없다. 결국, 그들은 모두 몰락하는 존재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드넓은 마른 평야에서 ‘하얀 십자가의 숲’을 이루며 잠들어 있는 1차 대전 참전 전사자들처럼 그들은 고통과 희생의 피를 땅에 뿌리며 생명을 준다. 그 땅은 때로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것을 지키는 그들의 방식은, 스스로는 몰락하면서 다음 생명을, 생명의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작가는 역사의 격랑을 헤치고 살아간다기보다는 빈번히 그에 떠밀려 살아가는 개인의 삶에 더 집중한다. 무거운 주제를 지나치게 비장하거나 장중한 문체로 쓰지는 않으려 한 점과 다채로운 배경에 비해 그 묘사는 가능한 한 간결하게 처리한 것이 눈에 띈다. 1920년대의 파리 예술계에 관한 묘사를 비롯해, 대한 제국 황실 비자금 스캔들의 진상을 파헤치거나, 정해용과 김현우의 접점을 찾는, 퍼즐 맞추기 같은 재미가 있고, 마약과 섹스와 폭력은 빠진, – 일본의 대한 제국 국권침탈이 가장 높은 수위의 폭력이긴 하다 – 21세기에 보기 드문 소설이다.

저자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10 대학 대학원에서 프랑스 현대 문학을 전공했다. 대학교 재학 중에는 성대신문이 주관하는 성대문학상 시 부문에 입상했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 문화원과 KBS 월드 라디오에 재직했고,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해 왔다. 두 차례의 장기 체류로 총 13년간 프랑스에서 거주했다. 프랑스 현지에서 집필한 프랑스 문학 기행 에세이 《마음은 천천히 그곳을 걷는다》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그 밖에도 다수의 책을 쓰고 번역했으며, 프랑스 문화에 관한 글을 각종 매체에 기고했고, 프랑스 영화를 번역하면서, 웹진에 영화 관련 에세이도 연재했다. 국립극장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 『빛의 제국』, 『자기 앞의 생』 극본을 번역하며 텍스트가 무대 위에서 새 생명을 얻는 순간을 지켜보기도 했다. 《하얀 십자가의 숲》은 그의 첫 장편 소설이다.

[출처 : 공중정원]